
굳이 할로윈일 필요는 없다.
마코 / 시죠세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 베네치아 옥상에서 시저와 나는 시시콜콜한 잡담을 자주 나누었다. 물론 수련에 대한 이야기는 적었고 그날 먹은 음식의 맛이 좋더라, 수지Q가 스커트를 바꿨길래 칭찬했다가 바꾼 게 아니라 며칠 전에도 입었던 것이라 혼났다, 기둥의 남자들을 만나기 전이었으면 당연했을 일에 관해서 주로 이야기했다. 목숨이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생활 속의 이야기만 하다 보면 대화거리는 똑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항상 24시간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
항상 메뉴는 똑같았다. 그때 아직 미성년이던 나는 오렌지 에이드, 성인이던 시저는 굳이 굳이 맥주 한 병을 샀다. 시저는 내가 형이니까, 라는 이상한 이유를 들어 음료를 내 것까지 계산해 줬다. 돈 많다는 말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아껴 쓰라는 이야기였다. 리사리사의 말에 따르면 날 만나기 전의 시저는 본인의 밑으로 들어오고 나선 작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난 시저가 좋아하는 여자도 아닌데. 네가 동생 같아서 그래. 하고 웃는 시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 어딘가가 살짝 간질거렸던 것 같다. 시저가 날 바라보며 웃는 그때만큼은 조각난 것처럼 세상이 분리됐다. 나는 그걸 나 혼자서 ‘시저 현상’이라는 이상한 말로 불렀다.
마스크는 시저의 관리였기에 함께 놀러 나가 점심을 먹고 음료를 한잔 마시는 시간까지는 완전히 벗을 수 있었다. 밥을 먹자마자 씌우려 드는 시저와 한참 실랑이를 한 결과였다.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음료 한잔 정도는 여유를 가지며 먹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부린 제 억지를 생각보다 순순히 시저가 받아 들여줬기 때문이었다. 정말? 정말이지? 하고 몇 번이고 묻는 날 시저는 성가시다는 듯 내 얼굴을 밀어내 치웠다. 지금 씌워주랴? 됐어, 됐어. 시저쨩 완전 사랑해! 일련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는 맨 얼굴로 시저와 마주하는 시간이 늘었다. 마스크는 표정을 많이 가려주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아닌 척 가리기엔 최적이지만, 시저에게는 솔직해지고 싶으니까. 완전한 타인이지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시저가 처음이고 유일했다.
나오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료를 사주는 시저 때문에 오늘은 이것저것 시켰다. 언제나 음료를 살 돈만 정확히 맞춰 가져오는 시저는 이미 전부 주문을 해버리고 주인장과 눈빛으로 짜고 친 판을 뒤집지는 못했다.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뒀을 음료값을 내 손에 떨어뜨리곤 테라스의 자리에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테라스 자리니까 돈을 더 받으려는 주인한테 팔을 들어 근육을 보여주니 그는 얌전히 포장구매 가로 맞췄다.
리사리사가 보지 않는 틈이면 담배를 피우는 시저의 앞주머니에는 담배가 들어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단 말이지. 사람을 패서 감옥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사지 말라는 걸 사려고 해서 가게 주인한테 혼난 적은 없다. 물론 지금 내 얼굴이면 그냥 사러 가도 아무도 뭐라 못한다. 신장 195cm의 근육질 남자에게 덤빌 배짱을 가질 사람은 없으니까. 다만 스피드왜건 할아버지가 준 용돈을 사소한 호기심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난 딱 한 개비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시~저쨩!”
“뭐야, JOJO. 또 흉계를 꾸미는 표정을 짓고는...”
“잠시만 실례!”
“뭣, 이 자식!”
상의 주머니에 없다! 이런 낭패를 보다니.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데 시저가 얼굴이 벌게진 채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벼....? 뭐라는 거야 시저. 알아듣게 좀 말해봐.
“이 변태 자식이!”
새된 비명을 지르고는 시저는 쏠리는 시선을 피해 복잡하기만 한 베네치아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난 베네치아 길 모른단 말이야. 저건 또 어떻게 찾지. 눈앞에 닥친 까마득한 문제에 쩔쩔매는 청년의 사정을 가게 주인은 봐주지 않았다. 양손 가득 먹을 걸 들고 저 골목길로 들어갈 엄두는 안 난다. 남의 집 벽을 타고 올라 지붕에 올랐다. 파문을 배워두길 잘했다. 손이 자유롭지 못해도 벽을 탈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지. 파문을 배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배우는 과정은 혹독했지만.
한참을 지붕에 지붕을 타고 시저를 찾아다녔다. 저 멀리에 빨랫감이 걸려있는 건물의 지붕에 시저가 앉아있었다. 막상 도망치긴 했어도 돌아가기로 한 시간이 있으니 찾기 쉽도록 올라와 준 거겠지. 날 듯이 뛰어 시저의 옆에 앉았다.
“삐졌어? 항상 쿨하던 시저쨩이 이러면 무서운데.”
“너...”
“응?”
“아까 왜 그런 거냐?”
“담배라는 거 궁금해서 그랬는데. 시저쨩 항상 거기다 넣어놓지 않아?”
“담배는 파문사한테 독이야.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마.”
“그러면서 리사리사랑 시저는 피우잖아.”
아까부터 토라진 기색이 있던 시저가 입술까지 쭉 내밀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시저 몫인 맥주를 손에 쥐여주고 음식 포장지를 풀었다. 따끈따끈하던 뇨끼는 시저를 찾아 헤메는 동안 조금 식어서 미지근했다. 맥주만 조금 입에 머금던 시저는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집었다. 먹으니까 다행이네. 돈은 많았지만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샀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베네치아의 잔잔한 바다를 응시하다 시저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이상한 분위기였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는 게 없다. 시저의 기일이면 집에서 슬퍼하고, 생일이면 사진 한 장 담긴 액자를 앞에 두고 작게나마 케이크라도 사서 축하했다. 시간이 흘러 홀리가 태어났을 땐 아이를 데리고 시저의 무덤 앞으로 갔다. 아빠의 제일 친한 친구야, 하고 말하면 될 걸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빠의 소중한 사람이야?”
“응. 엄청 소중했어. 우리 딸은 어떻게 알았을까?”
“사진에서 봤어.”
“사진?”
“노란 머리 오빠가 있는 사진, 한번 꺼내게 됐는데 접혀 있어서 폈더니 아빠가 있었어. 그렇게나 다정한 눈으로 보는데 소중한 사람이 아닐 리가 없잖아.”
장난삼아 찍은 사진 한 장이 시저가 남긴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래서 차마 사진을 찢을 생각도 못하고 접어서 넣은 액자였는데 그걸 홀리가 알아챈 것이다. 눈치도 좋지, 우리 딸은.
할로윈이면 부질없는 기대를 해보곤 한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시저가 돌아오기를. 간절한 소망은 이미 60년이 넘게 이뤄지지 않았지만 할로윈이 아니라면 내가 만나러 갈 테니까 괜찮다. 아마도 곧 가지 않을까. 시저가 기다리고 있을 천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