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로윈
선인장 / 화승
* 3부 엔딩 스포가 있습니다.
요 며칠간 죠타로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인상을 쓰는 건 기본이었고 가끔은 발에 걸리는 주변의 물건을 걷어차며 주변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기까지 했다. 미국에 온 이후로 나름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요 며칠 새 이렇게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오늘이 10월 31일, 통칭 할로윈이라고 불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할로윈. 죠타로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날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핑계로 각종 꼴 보기 싫은 귀신 분장을 한 사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날. 이 짧은 표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죠타로는 할로윈을 무던히도 싫어했다. 미국 유학의 조건으로 홀리와 더 이상 학교를 빠지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본에 돌아갔을 만큼.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멍하게 누워있던 죠타로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Trick or treat!”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거칠게 창문을 닫았다. 만약 이 쓸데없는 날을 만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면 죠타로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흠씬 두들겨 팼으리라. 창문을 닫은 걸로 모자라 커튼까지 쳐버린 죠타로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채,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죠타로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자신과 헤어지기 싫다며 울던 홀리를 외면하면서까지 죠타로가 미국으로 온 이유는 어떻게든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그를.
이집트로의 여행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죠타로는 알 수 없는 이질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했다. 죽을 뻔했던 홀리도 무사했고 자신이 부숴버렸던 학교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온 후였지만, 전처럼 돌아가기엔 분명 무언가가 달라져있었다. 그건 단순히 스타플래티나가 생겼기 때문도 아니었고 조금은 소원했던 죠셉의 빈번한 방문 때문도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죠타로는 자신의 내면, 무언가가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통해서, 정확히는 그 여행에서 경험한 죽음을 통해서.
카쿄인의 죽음. 그건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죠타로가 경험한 첫 상실이었다. 그전까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던가. 홀리를 살리기 위해 여행을 떠난 걸 후회하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죠타로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줄곧 생각해왔다. 사실은 자신이 감옥 안에서 그대로 죽었어야 했다고. 만약 그랬다면 분명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을 터라고.
그의 흔적이 없는 미국으로 와서 지금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지만, 한동안 죠타로는 그의 장례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만 감으면 그날이 떠올랐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그의 붉은색 머리와는 달리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던 장례식이. 그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 안에서 죠타로는 죽음의 무게를 배웠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 그건 남은 자들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죄책감을 안겨준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죠타로는 할로윈이 싫었다. 죽은 자가 저승에서 돌아와 산 자들 사이에 섞여 함께 노는 날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죽음이라는 건 이렇게 애들 장난처럼 다뤄져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매일 매일 그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도, 그와 처음 만난 장소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려도, 미련이 남아 시간을 멈추고 또 멈춰도, 절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던 죠타로는 갑자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안 봐도 뻔했다. 스스로는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내색을 좀처럼 숨기지 못 하는 죠셉의 얼굴을 떠올리며 죠타로는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뭐 하러 찾아왔...”
누가 찾아온 건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대뜸 신경질부터 낸 죠타로는 문 앞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할로윈에 잔뜩 신나있는 누군가가 장난으로 벨을 누르고 도망간 것이리라. 아까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죠타로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화낼 기운조차 잊은 채,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대로 현관문 앞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낮보다 길어진 저녁, 그리고 부쩍 쌀쌀해진 공기가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차가운 공기 속으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죠타로는 호박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이웃집을 바라보았다. 만약 죽음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죠타로 역시 분장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쥐어주며 그들의 놀이에 조금은 어울려줬을 터였다. 그 간단한 것이 불가능해진 자신이 싫어 죠타로는 괜히 얼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이질감. 그 견딜 수 없는 느낌이 싫어 미국으로 도망쳐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기 전부터 죠타로는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죽는 것이 싫었다. 적이었던 카쿄인을 생각 없이 구한 것도, 자신을 죽이려 한 적들을 죽이지는 않은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적이든 아니든 딱히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 했지만, 그건 디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원수라고는 했지만, 애초에 홀리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았다면 죠타로는 디오를 물리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비록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자신에게 과연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을 자격이 있는가? 아마 없을 터였다. 그래서 죠타로는 내내 그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물론 여행이 길어지고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다니는 디오의 부하들을 상대하며, 또한 재단이 전해주는 홀리의 소식을 들으며, 죠타로 역시 디오를 죽여야 한다는 건 깨닫고 있었다. 다만 제대로 각오를 다지지 못 했을 뿐. 사실 죠타로는 어떻게든 그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피하고 싶었다. 비록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나 홀리가 죽게 된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은 그 마음을 눈치 챈 것이 바로 카쿄인이었다.
“항상 명쾌한 답을 내는 너라지만, 확실히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생각이 많아지나 보네요.”
“...무슨 소리냐.”
“죠타로. 너는 적이었던 나의 목숨도 구해줬잖아요.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 넌 여린 사람이에요.”
“......”
“그러니까 알 수 있어. 네가 디오를 죽이는 걸 조금은 망설이고 있다는 걸.”
“...마음대로 지껄이는군.”
“걱정 마요. 죠타로. 나는 그를 죽이는데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이거야 원. 웃기지 말라고. 카쿄인. 네 녀석에게 그런 짐을 지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이집트로 막 들어서기 전날 밤,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굉장히 홀가분한 표정이었으리라. 물론 실제로 그에게 자신의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죠타로는 그의 말에 자신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때로 말이라는 건 굉장한 무게를 담고 있기도, 또는 무게를 덜어주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때부터 죠타로는 카쿄인을 좋아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를.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담긴 무게감을 덜어주는 그를.
그래서 디오를 죽일 수 있었다. 뒤늦게 마주친 디오의 입으로부터 카쿄인이 죽었다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죠타로는 생각했다. 왜 진작 마음을 다잡지 못 했던 걸까. 죽이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았던가. 또한 카쿄인이 자신을 돕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래서 디오를 대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결국, 모든 잘못은 헐렁한 각오를 카쿄인에게 들킨 후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 했던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죠타로가 디오를 죽이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사실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까지. 그건 죠타로가 죠스타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이상,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저주받은 운명을 욕할 틈도 없이 햇빛에 바스러져버린 디오를 뒤로한 채, 달려간 곳에서 카쿄인의 시체를 발견한 죠타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만약 카쿄인도 디오나 압둘처럼 시체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면 이 정도까지 충격을 받진 않았으리라. 멍하게 서서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카쿄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죠타로는 막연히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 하겠구나 라고. 또한 두 번 다시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지도, 웃어주지도 못 하겠구나 라고.
죠타로가 알게 된 죽음이란 그런 거였다. 한 존재를 현실에서 지워버리고 기억 속에서 밖에 만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리고 평생 후회하며 죄책감 속에서 살게 만드는 것. 그건 아직 미성년자인 죠타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시련이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도망쳤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면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눌 때 사용했던 일본어도, 둘만 입었던 교복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바보 같군.”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죠타로는 고개를 숙였다. 주변 사람들은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죠타로는 여전히 그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줄곧 곪아가고 있는 죠타로의 마음을 알아채 줄 사람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리라. 죠타로는 스타플래티나가 맨 처음 발현됐을 때, 자신이 했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신은 감옥 안에서 영원히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자신이 감옥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또한 스타플래티나가 총알을 잡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아직 살아있었을 터였다. 비록 머리엔 육아가 박혀있을지언정, 디오가 살아있는 이상 살아서 숨을 쉬고 생각을 하며 말을 했을 터였다. 그 사실이 죠타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죠타로.”
이런 저런 상념에 잡혀있던 죠타로는 그렇게 갑자기 귓가에 울려 퍼진 낯익은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단 50일 동안 들었던 목소리이자 약 10달 동안 듣지 못 했던 목소리. 사실상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죠타로 본인 아니던가. 너무 힘들어 아까부터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환청이 아니라면 방금 들은 건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몇 번이고 자신을 불러주던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죠타로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무도 없는 현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믿지 않는다며 주변에 괜한 짜증을 부리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속으론 몰래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귀신 분장을 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아있는 사람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넌 너무 상냥해요. 죠타로.”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들려왔을 때, 올해 초부터 여태까지 억눌러왔던 죠타로의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흐르기 시작했다. 귀신에 홀린 걸까. 죠타로는 만약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는 귀신이 정말로 카쿄인이라면 부디 자신을 홀려주길 바랐다. 그가 원한다면 몸이라도 내어 줄 생각이었다. 어느새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거슬려 거칠게 눈가를 닦아낸 죠타로는 목소리를 높여 그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후로 단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주인 잃은 이름을. 그 이름을 자신은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가. 그리고 그에게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던가.
“카쿄인... 미안해.”
그의 장례식에서도, 무덤 앞에서도 차마 하지 못 했던 한 마디.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그 짧은 한 마디가 죠타로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사과를 해도 받아줄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혹은 말을 내뱉어도 그가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과해도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었으므로.
“미안...미안하다. 카쿄인.”
장례식장에서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지금에서야 흘러내리는 건 그 때문이리라. 그저 다시는 듣지 못 할 줄 알았던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뿐이었지만, 애써 유지해오고 있던 평정심은 이미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어느새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한 채, 미안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던 죠타로는 다시 들려오는 그의 희미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을 떴다.
***
“죠타로. 이봐. 죠타로.”
“......”
“뭐냐. 악몽이라도 꾼 게냐.”
죠타로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죠셉을 발견하곤 신경질적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이었다. 왜 눈치 채지 못 했던 걸까. 애초에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니던가. 이럴 거면 그냥 일본에 남아있는 게 더 나았을 터였다. 죠타로는 오늘따라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사실 이렇게 미국으로 도망 온 주제에 그의 죽음을 떨쳐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글러먹은 거였다. 자신의 어중간한 결단력이 불러온 두 동료의 죽음. 몇 번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그 잔혹한 결과에 자신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이렇게 도망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밀려오는 답답함에 자신을 걱정하는 죠셉을 외면해버린 죠타로는 그를 방에 홀로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왔다. 조용하고 우울했던 안과는 달리 밖은 아직 할로윈이 한창이었다. 방금 전 꾸었던 꿈이 이어지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꿈과 똑같은 모습. 죠타로는 삐뚤빼뚤 조각된 호박들로 가득 찬 밝은 이웃집과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어두운 자신의 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치 홀로 다른 시간에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집.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죠타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미국으로 건너온 지 반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을 밀어내며 이질감을 만들고 있는 자신에게.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었다. 오늘따라 심하게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점점 숨이 막혀오는 걸 느끼며 죠타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시간을 영원히 멈추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괜찮아. 죠타로. 넌 잘 하고 있어.”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려 노력하던 죠타로는 갑자기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 너무 희미하게 들려 확신할 수 없었던 말. 그는 꿈속에서 정말로 자신에게 이 말을 건네줬던 걸까. 그리고 지금, 죠셉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걸까.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져주는 죠셉을 발견한 죠타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단순한 한 마디였다. 그 누구라도 가볍게 내뱉을 수 있는 말. 그러나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자신이 겪어온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죠셉, 그리고 카쿄인이라는 것에 그 의의가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죠타로는 내내 누군가가 잘 하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도망친 주제에 그곳에서도 여전히 엉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게.
이집트에서 카쿄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부터 죠타로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고 있었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라고. 죠타로는 그 단순한 질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부정하기엔 자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고 긍정하기엔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그런 죠타로에게 카쿄인이, 그리고 죠셉이 건넨 한 마디 “잘 하고 있어.” 는 그 의미가 컸다. 그래서였다. 그가 나중에 두고두고 놀릴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살짝 기댄 것은.
미국으로 온 것은 결코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소식이 끊겨버린 폴나레프와는 달리 자신의 곁에 남아준 할아버지. 아무도 모르는 이집트로의 여행을, 그리고 그 안에서 희생된 두 사람을 기억하는 그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죠타로는 죠셉의 넓은 어깨에 기대 오랜만에 깊은 편안함을 느끼며 이집트에서 보냈던 밤을 떠올렸다.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모두가 함께 의지하며 보냈던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따뜻했던 밤을.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그를.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진 죠타로는 다시금 눈을 감으며 상상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다 끝났으니 이제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의 목소리를. 그건 모두 당연히 일어날 줄 알았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죠타로는 오늘따라 무던히도 카쿄인이 보고 싶었다. 그의 붉은 머리와 흔치 않은 자색 눈동자, 조금은 큰 그의 입이. 그리고 실제로 듣고 싶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려 깊은 말이.
죠타로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그가 없는 현실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차가운 세계였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정체되어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할아버지 죠셉을 생각해서라도, 또한 자신을 돕다가 두 번 다시 할로윈을 맞이할 수 없게 된 카쿄인을 생각해서라도.
죠타로는 죠셉 모르게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태까지 정체되어 있던 걸 회복하기 위해선 앞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이질감에서 벗어나 원래의 평범했던 생활로 돌아가는 것. 간단해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그 회복을 위해 죠타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계속 외면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이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맨 처음 해야 할 일쯤은.
“...영감.”
“응?”
“조금 늦었지만 trick or treat.”
“엥?”
“뭐, 사탕은 당연히 없을 테니 괴롭히면 되는 건가.”
“무...무슨?”
자신의 말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는 죠셉을 외면한 채, 죠타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간단하게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이 이질감부터 없애가야 할 터였다. 당연하게도 쉽진 않으리라. 지금에 와서 대놓고 무시하고 있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죠타로는 꿈속에서 들었던 카쿄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작년 겨울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갈 거라고. 그리고 꿈속에서 밖에 하지 못 했던 사과를 그에게 건넬 거라고. 아마 그 누구보다도 상냥했던 그라면 보이지 않더라도 환하게 웃으며 화답해주리라.
“괜찮아. 죠타로. 넌 잘 하고 있어.”
라고.